천영세, 신인령 노동자를 지독히 사랑했던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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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상헌 지부장 가슴에 남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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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간부가 되면서 뭔가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 그런데 1960년대는 어디가서 물어볼 만한 곳도 없었거든. 답답한 마음이었지만 당시 한국노총은 회사와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라는 입장이었고.... 한국노총과는 어떤 얘기를 하기도 힘든 상황이었어. 노동조합으로서 정당한 활동은 놔두더라도 우선은 회사로부터의 자주성이 가장 중요했거든. 자주성을 못 지키면 노조의 존재 의미도 없고, 조합원이 주인이 되어야 하는데 그게 안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보았지. 약 12년 간 지부장으로 있으면서 조합원들이 집행부를 믿어준 것은 회사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철저히 자주적이고, 조합원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생각에서였던 것 같아…"


[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남상헌 지부장과 함께 교육받은 1기 교육생들이 마지막 날 기념사진을 찍었다. ]

고려피혁 지부장이 되어

1968년부터 12년 간 고려피혁 지부장을 맡은 남상헌 지부장에게 45년 넘게 노동자로 살아오면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슴에 남는 사람이 누구인지 물었다. 지부장이라는 직책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당시의 척박한 교육상황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남 지부장은 생전 처음 받았던 노동자 교육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을 손꼽았다. 

1964년에 입사하여 12년 간 지부장을 맡았지만 당시는 노동조합 활동을 하기 쉬운 상황이 아니었다. 한국노총산하 화학노조의 지부인 고려피혁지부와 조직상 관계를 유지해야 했던 화학노조는 고려피혁의 자주적이며 민주적인 노동조합활동을 겉으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속으로는 곱게 보지 않았다. 직접적으로 압박을 가할 명분을 찾기 쉽지 않은 상태에서 고려피혁지부는 화학노조에게 골치 아픈 존재였던 것이다. 

또, 고려피혁지부는 남 지부장이 당선되기 전까지 회사의 지원을 받아 노동조합을 운영해왔었다. 고려피혁 노동자들도 억울한 마음이나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누구나 가지고 있었지만 이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방법을 몰랐다. 회사로부터 보조금을 받는 한, 노동조합이 회사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남 지부장이 당선된 후 회사는 노조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중단했다. 당시 오랫동안 노사관계가 주종관계로 인식되어 온 풍토 속에서 평균 연령 40세 이상의 조합원들이 회사를 상대로 불만을 표출하기는 힘들었으며, 상부조직 또한 이런 문제들을 올바로 지도하고 육성하기보다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고 이 가운데 상당한 입지를 세워나가려 했기 때문에 현장의 문제들은 그대로 묻혀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종전과 달리 당시로는 젊은 노동자에다, 회사를 상대로 자주성을 내세우는 지부장이라는 점이 회사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것이다(남 지부장은 1937년 생이다). 하지만 남 지부장은 조합원 총회를 열어 운영상의 어려움을 조합원들과 논의한 끝에 조합비 인상을 결정하여 재정문제를 해결했다. 물론 제혁업종의 열악한 노동조건 상 중식시간 이외에 조합원들을 모으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조합원들이 '지부장이 알아서 하라'고 푸념할 만큼 끊임없이 중식시간과 저녁시간을 쪼개어 모일 시간을 마련했고, 이러한 중식시간의 토론과 노동조합 활동은 노동자들의 불만과 문제들을 모아 이를 조직의 요구로 만들어 회사와의 협의에서 조합원들의 힘을 모아내는 유일한 통로였다. 

노동교육에 대한 목마름

자재를 과도하게 독점하면서 회사는 두 차례의 부도를 겪고, 1972년 대우에 인수되었다. 회사가 부도나는 과정에서 2∼3개월 임금이 체불되었는데 평소의 임금으로도 생활하기 어려웠던 조합원들에게 임금체불은 버티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에 노조도 근로조건, 생활조건개선이라는 임무보다 체불임금해결이 급선무였다. 따라서 체불임금 지급을 요구하며 전 조합원이 파업을 전개, 사무실을 점거하여 2∼3일씩 몇 차례 단식농성을 전개하기도 했다. 

대우 인수 후, 노동조합은 노조 사무실을 마련하고, 지부장도 반상근에서 상근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인수 후 노동조합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서서히 드는 생각은 대의원들뿐 아니라 남 지부장 자신도 체계적인 노동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점이었다. 

당시 별도의 교육프로그램이나 모임은 없었다. 주로 퇴근 후 술자리를 통해 조합원들끼리 토론하며 신뢰를 쌓거나 부서별로 중식간담회를 개최하는 정도였다. 삼원섬유 유동우씨가 쓴 『어느 돌멩이의 외침』을 중식시간에 모여 돌려읽으며 업무를 마치고 토론하는 것이 교육에 한몫을 차지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부족함을 느끼던 중 체계적이며 지속적으로 노동교육을 받을 기회가 생겼다. 


[ 1975년 9월 천영세 차장이 화학노조 신규조직 간부교육을 마치고 참가자들과 함께 찍었다. ]

화학노조 천영세 조사연구 차장

그 즈음 남상헌 지부장은 화학노조 조사연구실에 천영세라는 사람이 새로 왔는데 민주적인 노동조합을 세우기 위해 애쓰는 사업장에 관심을 갖고 찾아다닌다는 얘기를 들었다. 역시나 천 차장은 고려피혁 지부에 대해서도 정보기관이나 화학노조의 눈에 띄지 않게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도움을 주려 했다. 그러던 중 대우에서 고려피혁을 인수할 무렵, 그의 주선으로 고려피혁 대의원들이 처음으로 서강대에 모여 대의원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남 지부장도 고대 노동문제연구소 3개월 교육과정에 참가할 수 있었다. 

이뿐 아니라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교육위원을 맡았던 천영세 차장은 남 지부장이 이곳에서 교육을 받도록 주선해 주었고, 그 과정에서 서로 보다 깊은 이해와 신뢰를 쌓을 수 있게 되었다. 크리스찬 아카데미는 당시 강원룡 목사가 1974년부터 노동산업사회, 학생사회, 여성사회, 교회사회, 농촌사회 등 5개 부문 교육을 주관한 단체였다. 노동조합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던 강목사의 의지 덕분에 크리스찬 아카데미는 노동교육이라곤 없던 척박한 현실에서 노동교육의 필요성을 느낀 사람들의 집합소 역할을 했다. 그의 기억 속에 천 차장은 '마른 땅에 물 스며들 듯' 표나지 않게 지속적으로 노조를 지원해주고, 관심을 가져준 사람이었다. 

크리스찬 아카데미 신인령 간사

작은 체구에도 끄떡없이 당차게 교육을 진행하던 한 사람을 기억한다. 바로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교육간사를 맡은 신인령이라는 당시 이화여대 법학과 석사였다. 신 간사는 노동법을 전공하면서 당시 교육과정의 진행 및 강의를 맡았다.

남 지부장은 수원 아카데미 교육원에서 4박5일 교육을 받을 때 처음으로 워크샵이라는 토론식 강의를 배웠다. 이 수업에서 토론을 시작하면 새벽1시∼2시를 넘기는 게 예사였는데 항상 다음날 새벽이 되면 전날의 토론내용을 신 간사가 깨끗이 정리하여 자료집으로 만들어 내놓는 것이었다. 몸이 상당히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열성적으로 교육활동에 임하는 모습을 남 지부장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또, 크리스찬 아카데미 교육을 수료한 후, 수료자 중심의 정기 토론모임인 '노동사례연구회'를 만들었을 때도 신 간사는 함께 하여 전화 연락, 참여자 확인, 실무자 독려 등의 실무적인 일들을 도맡아 해주었다. 그러면서도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원칙에 어긋나지 않도록 노동자들이 직접 하기에 조건이 어려운 일들만을 챙기려고 애썼다. 노동사례연구회 활동은 구성원들의 꾸준한 활동과 더불어, 뒤에서 지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신 간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버팀목이 되어 준 이들

크리스찬 아카데미 교육은 1979년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을 겪으면서 중단되었다. 이는 유신체제 말기인 1979년 노동자, 농민, 여성에 대한 중간교육 집단 프로그램에서 반정부적이고 반국가적인 내용을 가르치고, 불온써클을 조직한 혐의로 관계자 6명이 구속되고 30여명이 연행된 사건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교육을 이끌었던 신 간사도 구속되었다. 

하지만 이들과의 만남을 계기로 남 지부장은 노동교육을 받고, 교육 후에도 1975년 노동사례연구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아카데미 교육 이수자들이 모여 지속적인 토론의 장을 마련할 수 있었다. 노동사례연구회에서는 1977년부터 매달 「우리는 노동자」(이후 「노동사례연구회 회보」로 이름변경)'라는 회보를 발간했는데 주로 회원들의 소식과 목요토론회에서 발표된 사례내용을 다뤘다. 이 때 모인 대부분의 노조가 당시 민주노조운동에 앞장섰던 청계, 반도, 원풍모방, 콘트롤데이타, 동일방직, YH노조들이었고, 현재 '70년대 민주노동운동 동지회(70민노회)'로 이어지고 있다. 이들 중 누군가가 썼을 법한 글이 빛바랜 아카데미 크리스찬 교육자료에 남아있다.

악덕 기업주 너! 정신차려라 삥땅 핑계삼아 검신하는 놈
소주병에 눈 오줌마시고 정신차려라 
우리가 도둑이냐 방산시장 테이프 10센티 지혜에 사용주 녹았다
여자라 깔보고 각서각서 퇴직각서 각서더미 밑에서 깔려죽어라


아카데미 사건 후 1980년 정화조치로 남상헌 지부장은 해고되었다. 그러나 해고된 후에도 1984년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1988년 '80년 해직노조간부복직추진위원회' 등에 참가했으며, 1990년 전국노동자협의회(전노협) 상임지도위원에 이어 민주노총 지도위원을 맡고 있다. 

남상헌 지부장과 30년 가까이 인연을 맺어온 천영세 차장은 현재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으로, 신인령 간사는 1985년 이후 현재 이화여대 법학과 교수로 있다. 희미해질 법도 한 기억들이지만 그는 노동자보다 노동문제를 훨씬 더 깊게 고민하고, '노동자보다 노동자를 더 지독하게 사랑한 사람들'로 천 차장과 신 간사를 꼽는다. 요즘 사회를 보면 상황과 이해에 따라 신념이 변하는 경향이 많은데 자신이 세운 가치를 바꾸지 않고 그에 따라 일관된 모습으로 살아온 그들이었기에 더욱 가슴에 남는다고 덧붙인다. 이들이 바로 한 노동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바른 목표를 향해 살 수 있게 한 버팀목이었다는 남상헌 지부장은 지금 생각해봐도 고마운 일이라며 교육 때 찍었던 옛 사진을 보며 빙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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