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의 전태일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어쩌면 반지의 무게와 총칼의 질타에 구애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않기를 바라는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 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 1970년 8월 9일 전태일의 일기 중에서
인간해방의 덩이를 굴리는, 전태일의 일부인 우리들
전태일이 분신항거하기 세 달 전 청옥 고등공민학교 때 친구인 원섭에게 쓴 편지글 형태의 유서 내용입니다. “굴리다 못 굴린 덩이”를 “그대들에게 맡기고” 죽은 후에도 더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 덩이를 계속 굴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들의 일부인 나” 전태일은 지금도 덩이를 굴리고 있습니다. “덩이”란 무엇입니까? 그의 삶 전체로 추구했고 죽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평등·자유·정의의 ‘인간해방’입니다.
조영래 변호사도 『전태일 평전』 첫머리에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얘기하려는 사람은 누구인가? 전태일.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재단사라는 이름의 청년노동자. 1948년 9월 28일 대구에서 태어나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앞 길거리에서 스물둘의 젊음으로 몸을 불살랐다. 그의 죽음을 사람들은 ‘인간선언’이라 부른다.” 그래서 전태일을 따르는 모든 ‘전태일의 일부인 나’는 인간해방의 덩이를 이 시간도 굴리고 있습니다.
또한 전태일에게 있어서 인간해방이란 “반지의 무게”와 “총칼의 질타”에 구애받지 않는 삶이었습니다. 자본(돈)과 (국가)권력에서 자유로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인간의 욕심을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나 집단적 욕망을 폭력으로 합목적화하는 권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삶은 인간적 삶이 아니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전태일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울림
결국 그는 자기 시대에 맞서 할 수 있는 일을 다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희망은커녕 하루도 버티기 힘든 가족으로부터 과감하게 탈출하여 여러 차례 가출을 시도했고, 함께 데리고 나온 동생들과의 생존을 위해 구두닦기, 신문팔이, 껌장사 등 돈이 되는 일은 뭐든지 했습니다. 열여섯 나이에 청계천 평화시장으로 가서 미싱보조인 ‘시다’에서부터 봉제노동자로 첫발을 내디디면서 각성한 노동자의 삶을 시작합니다. 가정교육은커녕 학교교육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전태일이 어떻게 이런 온전한 삶을 살게 됐는지는 의문입니다만, 뜨거운 삶의 현장에서 스스로 깨친 삶의 모습이 놀랍기만 합니다.
그의 유서나 「모범기업 취지문」에도 잘 나타나 있지만 그는 삶의 목적이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자신과 가족을 책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함께 일하는 자신보다 어려운 주변의 노동자와 함께 잘 사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차비를 아껴 배고픈 어린 시다들에게 빵을 사주는 것은 그의 삶의 태도의 상징적 한 단면입니다. 그는 그것을 위하여 최선을 다 합니다.
우선 개인적으로 도울 수 있는 일은 도우면서 여럿이 뜻을 모으고 힘을 키우기 위해 바보회, 삼동회 등 조직과 연대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 단결된 힘으로 체불임금 등을 해결하는가 하면, 노동현실을 사회적 문제로 바라보며 실태조사를 통해 노동청 등에 호소하는가 하면 언론에 보도케 해서 구조적 해결에도 애를 썼습니다. 심지어는 대통령에게 탄원하는 편지를 쓰기까지 했으니까요. 그는 또 한편으로는 태일피복이라는 모범기업을 만들어 직접 운영함으로 기업의 사회화를 통한 자본과 노동의 선순환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초기 투자금을 마련하지 못해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가 세워놓은 구체적 계획은 지금 보아도 머리를 끄덕이게 합니다.
그는 그 시대에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남은 몸뚱이와 붉은 마음을 자기 삶의 목표를 향해 바쳤습니다. 그는 자기 확신에 충실했기에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당당하게 외쳤습니다. 그는 지금도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자기의 덩이를 굴리고 있습니다.
그가 간 지도 어언 48년, 곧 50주년이 됩니다. 그 동안 우리 사회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엎치락덮치락하는 정치정세 속에서 노동자 민중의 삶은 절대빈곤과 상대적 불평등 속에서 여전히 고통 받고 있습니다. 아직도 많은 노동자들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는 그 시대 전태일의 구호를 오늘도 외치고 있습니다. 시민들이 모두 나서서 촛불혁명을 일으키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지만 형식적 민주주의마저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계는 지구온난화의 가속 속에 4차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괴물이 이빨을 세우며 달려오고 있습니다. 희망을 얘기하기가 민망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며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일을 자기 자리에서 해야 합니다. 전태일이 덩이를 굴리듯 우리도 우리의 덩이를 굴려야 합니다. 전태일 같이 죽어서도 굴릴 각오로 굴려야 합니다.
오늘날의 전태일들, 파리바게뜨 노동자들을 소개합니다
저는 최근 그런 자세로 시대에 맞는 덩이를 굴리며 오늘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 노동조합을 만났습니다. 바로 오늘날의 전태일입니다. 파리바게뜨노동조합과 사무금융노동조합입니다. 그 노동조합의 조합원이나 주변 인물들에게 들은 얘기를 정리해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 파리바게뜨지회(이하, 파리바게뜨지회)는 불법파견과 연장시간 꺾기를 통한 임금 착취에 맞서 작년(2017년) 8월에 노조를 결성하고 5개월여를 투쟁하여 직접고용과 체불임금을 쟁취해낸 조직입니다. 파리바게뜨와 도급계약을 맺은 협력업체가 고용한 제빵 및 카페 기사들은 전국 3,500여 개 파리바게뜨 매장에서 파견근무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실제 업무지시나 인사권한은 대부분 본사가 직접 지시·감독해왔던 전형적 불법파견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파리바게뜨 제빵·카페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만들어 이런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로 하고 작년 8월 17일 인천에서 41명으로 노조(지회)를 결성하고 전국 각지의 제빵·카페 노동자들에게 노조 가입을 독려하고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8월 31일 노조설립보고대회에는 조합원 부모님이 참석하여 격려하는 등 매우 감명 깊은 장면을 보였던 조직이기도 합니다. 이후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여, 2018년 1월 11일 정치권과 시민사회단체까지 함께한 사회적 합의에 이르게 됐습니다. 파리바게뜨지회 노조활동과 투쟁의 의미와 시사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프랜차이즈업계의 불법파견 실태를 공론화하고 바로잡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입니다.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사례에서 보듯, 대기업 자본은 불법파견을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대법 판결마저 무시해왔습니다. 파리바게뜨지회의 투쟁은 간접고용 불법파견 문제점을 공론화하고 사회쟁점화하여 ‘이익은 취하고 책임은 회피하는’ 간접고용의 문제점을 다시 환기시키는 의미가 있습니다.
둘째, 비정규직 청년노동자 노동권 신장과 여성 및 모성보호에 기여한 투쟁이었습니다. 파리바게뜨 제빵·카페노동자들은 20대와 30대 청년들이 주축인데, 여성이 7~80%를 차지합니다. 파리바게뜨의 불법파견 사례는 노동인권 사각지대에 있는 제빵업계 비정규직 청년노동자 문제를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전국 매장에 개별로 흩어져있는 제빵·카페 노동자들은 각종 인권 침해와 위험으로부터 무방비 상태였습니다. CCTV 감시감독, 폭언과 욕설, 외모비하와 모욕적 발언, 성희롱 또는 성차별 등등의 각종 인권침해는 투쟁 기간 내내 언론에 보도될 만큼 차고 넘쳤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회는 “청년노동자에게 빵보다 노동권”을 노조활동의 기치로 내걸고 투쟁해왔습니다. 그 결과 많은 점에서 인권침해 사례가 개선될 수 있었고, 임신노동자 보호에 관한 회사의 공식 조치들도 개선시켜냈습니다.
셋째, 노조하기 어려운 “균열된 일터”에서 노조할 권리를 실현한 선례를 남겼습니다. 전국에 흩어져 매장에는 1~2명씩 근무하는 제빵기사들 서로도 잘 모르거나 직접 만날 일도 없습니다. 이 때문에 노조 가입이나 노조활동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쉽지 않은 조건입니다. 자본은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을 배경으로 사내하청, 사외하청, 해외하청, 소사장제, 프랜차이즈, 위탁경영, 도급계약 등과 같은 방식으로 회사를 쪼개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로 인해 노동자들은 임시직, 기간제, 파견직, 시간제, 일용직, 특수고용직 등으로 불안정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에도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비정규직 청년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노조를 만들고 1인 시위나 천막농성투쟁까지 했다는 점은 큰 의의가 있다할 것입니다.
넷째, 시대 변화에 따른 노조 조직화와 활동방식의 능동적 다변화를 선도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전국 각 매장에 흩어져 있는 노동자들이 노조로 조직되는 경로는 얼굴도 모르고 가입을 조직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반영한 다양한 조직화 방식이 제빵·카페 노동자들 스스로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면, <구글>로 가입원서를 받고 <네이버 밴드>를 통한 조합원 관리는 기본이고, <인스타그램>, <카톡 플러스친구> 등의 SNS를 통한 노조교육과 선전홍보, 노동상담, 노조가입 조직화 등이 이루어지고, 팟캐스트 방송을 통해서도 노조활동이 공유되고 교육과 홍보 등이 이루어진 사례가 그런 것입니다.
더불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무금융노조
민주노총 산하 사무금융노조는 2011년 12월 출범 당시 30여개 지부, 1만 9천여 명의 조합원에서 현재까지 7년여 동안 조직전환과 지부설립을 통해 85개 지부, 4만여 명의 조합원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는 민주노조 운동이 지향하는 산별노조 조직 강화를 위해 꾸준히 투쟁하고 노력한 결과입니다. 산별노조의 정신인 단위사업장이나 개별기업의 임금과 복지만이 아닌 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노동자들의 권익과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금융산업은 국민경제 전반을 움직이는 경제의 혈액 역할을 하지만, 노동자들의 임금 격차와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금융산업의 노동자들에게는 ‘이기적 집단’ ‘이윤만을 추구하는 집단’ 등 부정적 이미지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문제를 노동조합 차원에서 해결하기 위해 사무금융노조는 발 벗고 나섰습니다.
정규직노동자인 재단사 전태일이 점심을 굶는 여공들을 위해 자신의 차비를 털었던 풀빵 나눔과 연대의 정신을 되살려, 비정규직 정규직화, 청년실업 해소, 최저임금 1만 원 실현 등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사업을 추진, 노동조합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2018년 2월 대의원대회에서 ‘불평등 양극화 해소를 위한 사무금융노조 특별위원회’ 구성과 활동을 결의, 3월 그 실천으로 ‘우분투 프로젝트’를 추진하였습니다.
우분투 프로젝트는 ‘네가 있어 내가 있다’는 정신을 기본 철학으로, 사무금융직 노사가 뜻을 모아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과 차별을 해소, 더불어 살아가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자는 희망의 제안이며, 특히 정규직 노동조합이 나서야 함을 강조한 사업입니다. 일회성 사업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사업으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3월 5일 불평등 양극화 해소를 위한 특별위원회 1차 회의 이후 현재까지 매주 24차 회의를 진행하며, ‘사회연대기금 국회토론회’(2018년 3월 28일), ‘사회연대기금조성 노사공동선포식’(2018년 4월 18일)을 통해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업종본부별 간담회와 지부 설명회를 통해 사업목적 및 소통을 강화하여, 사무금융노조 30개 회사대표 및 52개 지부장이 참석하는 ‘사무금융노사 제1차 산별중앙교섭’(2018년 6월 5일)을 진행, 사무금융노조 역사상 첫 번째 산별중앙교섭으로 언론의 관심과 함께, 노사가 함께 2018년부터 전태일 열사 50주기인 2020년까지 3년간 600억 원의 사회연대기금을 조성키로 합의했습니다.
이러한 지속적인 소통과 활동의 결과로 2018년 9월 현재 KB증권 노사가 24억(2018년 1회분 8억), KB국민카드 노사가 15억(2018년 1회분 5억), 교보증권 노사가 9억(2018년 1회분 3억), 애큐온저축은행 노사가 3억(2018년 1회분 1억) 등 합의하였으며, 현재 많은 지부에서 논의가 진행 중에 있다고 합니다.
또 사무금융노조는 매년 임금 및 산별교섭 단체협약 공동요구안으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임금차별 금지를 요구하여 실제로 많은 지부에서 계약직을 정규직 또는 무기계약직으로 전환시키고 있으며, 하나외환카드의 경우 정규직의 양보로 파견직을 전원 정규직으로 전환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과로사회 근절과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청년일자리 창출을 위해 서울시와 함께 주당 40시간, 연간 1,800시간으로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노동시간 단축 협약식’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전태일은 언제나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이 밖에도 많은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노동자의 삶과 건강한 사회를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이 각자의 덩이를 굴리는 싸움이 멈추지 않는 한 우리의 삶과 우리 사회는 달라지리라 확신합니다. 시대의 전태일은 언제나 이렇게 살아있습니다.